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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회 신각수동문 편지
작성자 홍기엽 등록일 09.12.31 조회수 241
2009년을 보내며,

작년 이 맘 때 오랜만에 서울에 들어 온 첫 해가 저물어 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한 해를 마감하는 소회를 보내 드린 것이 엊그제 같은데 다시 곧 해가 바뀌게 됩니다. 아는 분들이 보내 주시는 정성어린 연하장을 받으면서 올해도 2009년을 닫는 이메일로 인사에 대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하루가 어찌 가는지 모르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올해는 연말에 보직이 바뀌어 더욱 정신없는 연말이 되었습니다.

지난 11월 17일 2차관에서 1차관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1차관은 지역 업무를 관장하는 6개 지역국과 인사, 조직을 관할하는 자리입니다. 돌아가신 선친이 오랫동안 교육청에서 장학사로서 인사 업무에 많은 골머리를 썩이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실제로 맡고보니 인사의 어려움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직이 살아 움직이려면 인사가 잘 되어서 모두 적재적소에서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대우받도록 해야 하는데 말과 달리 그리 쉽지 않습니다. 지역 업무는 한국의 높아진 국제위상과 높은 대외의존도로 인하여 다양한 사안이 우리의 창의적이고 시의적절한 대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사는 시대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세계화가 진전되고 이에 따라 국가간의 경쟁력이 치열해지는 상황은 지난 40년간 정신없이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의 길을 뛰어왔던 우리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우선 한반도의 상황도 북한의 상궤를 벗어난 일련의 행동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수면 하에서 많은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북한은 금년 전반기 미국 행정부 변화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통해 국제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일치된 행동으로 강력한 제재가 부과되면서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 화폐개혁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오래 된 계획경제의 구조적 모순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2002년 이후 이미 어느 정도 뿌리내린 시장과의 싸움을 시작하였는데 제한된 공급능력으로 인플레 억제는 불가능하고 사회적 모순 또한 깊어갈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2012년 강성대국의 기치를 내세운 북한이 경제회복과 권력승계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겠지요.

평양은 한국, 미국, 일본, 중국에 다양한 유화적 제스처를 쓰고 있지만 승계문제와 경제난을 해결해 보려는 전술적 변화에 지나지 않아 보입니다. 북한은 유일한 전략 자산이자 정권의 생존보장수단으로 여기는 핵개발을 포기하는 전략적 결단을 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북한의 전략적 결단을 촉진하기 위해 국제사회는 많은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난 93년 핵위기 이래 두 번에 걸친 북한의 속임수 패턴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6자회담이 재개되면 조기에 가시적인 비핵화 조치를 유도할 그랜드바겐 구상의 실현에 국제적 노력이 집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금년에는 한반도 주변 4개국의 관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미국과는 21세기 동맹미래비전을 채택하여 구체화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전통적 의미의 군사적 동맹에서 지역적, 세계적 차원의 협력을 포괄하는 전략적 동맹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전후 일본을 지배해 온 자민당 체제가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섬으로써 우애외교, 동아시아공동체 등 아시아에 다가가는 한편 미국과는 후텐마 기지이전문제, 핵반입 밀약의 공개 문제 등으로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과거사에 대해 전향적인 새 정권이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새해에 한국인의 마음의 상처를 아우르고 새로운 100년을 향해 나갈 수 있을지 기대 반 우려 반입니다.

중국은 건국 60주년을 맞아 급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 외교력 면에서도 G2라고 불릴 만큼 국제질서의 변동인자로서 몫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향후 중국이 얼마나 국제질서의 책임 있는 행위자로서 행동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외교 환경은 상당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반도 관리에 있어서 중요성을 더해 가는 중국과의 관계가 2010년에는 착실한 진전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한 해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러시아는 자원에만 의존하는 경제와 아직도 권위주의적인 체제 경직성으로 인하여 간절히 원하고 있는 냉전 당시의 영향력을 확보하기에는 여러 장애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내년은 한-러 수교 2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한 해로서 다양한 교류행사가 예정되어 있고, 이와 함께 한반도 문제에 관한 러시아의 건설적인 역할이 기대됩니다.

바닥을 친 세계경제의 향방과 함께 국제정세도 불확실성의 세계에 접어들었고 2009년을 장식한 몇 개 단어 가운데 “불확실성”이 꼽혔다는 것도 새삼스러울 게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무엇보다도 원칙에 충실하게 나가는 것(Back to the Basics)이 중요하리라고 봅니다. 물론 “일관성은 노새의 장점”이라는 부트로스 갈리 전 유엔사무총장의 말처럼 유연성을 결여해서는 안 되겠지요.

올해도 우리 외교는 착실한 진전이 있었습니다. 한-ASEAN 20주년 특별 정상회담에서 절정에 달하였지만 우리 이웃 아시아에 다가가는 신아시아외교가 꽃을 피우게 되었지요. 앞으로 보다 견실한 관계 구축이 이어질 것으로 봅니다. 또한 세계 제1의 경제권인 EU와는 FTA가 체결되고 기본협력협정 개정작업도 끝나 앞으로 착실한 발전의 탄탄한 토대를 닦았습니다. 이와 함께 중남미, 아프리카, 중앙아 등과도 정기적 포럼 개최를 통해 실질적 관계 진전을 도모하였습니다. 무역, 에너지, 자원, 식량 등 모든 면에서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에게 있어서 세계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핵실험에 대응한 안보리 제재 채택, 기여외교의 주요 수단인 ODA법 및 PKO법 제정, OECD 원조위원회 가입, 외교부 예산 증액 작업, 유엔인권이사회 재검토 회의 참가, 북한 인권에 관한 국내외 관심 제고, 청해부대 소말리아 파견, NATO와의 관계 강화, 한국인의 국제기구 고위직 진출, 한국을 빛낸 외교인물 사업, 문화외교 강화, 예멘테러사건 수습, WEST사업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외교업무를 수행하면서 느끼는 가장 절실한 소회는 우리 국민들이 커진 국력과 위상을 제대로 느끼지 못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과잉민족주의와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냉정함을 잃어버리거나 국제 감각이 부족한 경우가 종종 나타나게 됩니다. 한국이 처한 어려운 지정학적 여건과 높은 대외의존도를 고려하면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우리 국민의 대외인식이 높아야 합니다. 명년에는 G20 정상회의도 개최하고 DAC 회원국도 되는 만큼 성숙한 세계시민의식과 세련된 외교 인식을 갖춘 품격 있는 국민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고 외교부도 힘을 많이 쏟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1년 반 동안 차관직을 맡으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우리 외교는 분명히 성장산업인데 고속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인력과 예산이 따라주지 않아 직원들 모두가 매우 힘들어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제 오늘에 형성된 현실이 아니므로 시정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후배들에게 보다 좋은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미력이나마 더욱 열심히 일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다지게 됩니다.

2010년대에는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이 되고, Korea Discount가 없는 평화롭고 안정된 한반도를 구축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막중한 과제의 한 축을 외교가 떠맡고 있고 그 일익을 담당할 기회가 주어졌다는데 대해 감사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은 2009년 풍성한 한 해를 보냈습니다. 80대 중반이신 어머님은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하시고 8월에는 캐나다에 이민 간 동생 집에 가셔서 잘 지내시고 계십니다. 역시 아들보다는 딸인 모양입니다. 집사람 소선은 오랜만의 서울 생활을 잘 즐기고 있습니다. 부부란 해가 갈수록 오래 된 친구 같습니다. 연초 공군 통역장교로 복무를 시작한 희석은 Air Show 행사를 잘 마치고 국군체육부대에 배치 받아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OB 맥주 입사 2년이 된 희영은 외국회사에서 외국 펀드로 소유가 바뀐 뒤 고된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여가고 있어서 신통하기만 합니다. 아빠의 직장생활을 이해하겠다는 말을 할 때 대견하더군요. 모두 저희를 아껴주시는 분들의 음덕이라 생각하고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밝아오는 새해 경인년은 북한식으로 얘기하면 꺾어지는 해로서 경술국치 100년, 6.25 60주년, 4.19 50주년, 5.18 30주년이 겹치는 해입니다. 대내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변화 속에 기회와 위험이 있습니다. 기회에 대비하고 위험을 사전에 막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새해에도 변함없이 아껴주시고 성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늘 건안하시고 댁내에도 사랑과 평화가 가득 하기를 기원 드립니다.

2009년 12월 30일

신 각수 드림




외교부 1차관
신각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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